*[Commission] 조각글 커미션 공지사항 *커미션 샘플 글, 오늘의 커피 타입(5,127자) *헬싱, 아카드 드림. 드림주 이름有. *드림주의 이름의 경우 요청 하에 가림처리하였습니다. *BGM Tido kang - 북극성(Polaris) |
북극성은 계절에 상관없이 대부분 같은 자리를 지킨다. 그리고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늘 자기의 인생길을 인도하는 각자의 북극성이 있다. 지구가 돌아가도 늘 북쪽을 가리키는 북극성처럼 마음의 북극성은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고 자기가 진정 원하는 바를 분명히 가리킨다. 1
남자에게 있어서 유일무이한 북극성은 바로 당신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고 자신의 곁에 머물 단 하나뿐인 별.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남자의 무한한 삶 속에서, ‘사랑’이란 것은 말하자면 이야기 속의 존재나 다름이 없었다. 실재하고 있으나 그 자신에게 결코 해당될 리 없는 것. 바로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허무맹랑한 전설이나 뜬 소문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그에게 있어서는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은 그의 유일한 북극성이 되었다.
남자가 삶이라는 끝없는 어둠 속에서 영원히 길을 잃고 헤맬지언정, 언제나 새하얗게 그의 길을 밝히며 빛날──그의 유일한 북극성.
눈을 뜨면 그곳은 눈부시게 새하얀 설원이었다.
영하로 떨어진 기온과 더불어 찬바람까지 피부에 스며드는 것이, 손이나 귀가 시리다 못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살이 에는 듯한 깊은 추위에 여자는 저도 모르게 덜덜 떨려오는 양팔을 다급히 감싸 안았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제 온기를 보존하기에는 어려웠다. 뼛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고 있는 것 같은 살벌한 추위에 그녀의 뺨이 금세 새빨갛게 물들었다. 입가에 피어오르는 한숨 또한 하얗게 질려있어, 지금 이곳이 얼마나 추운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건 꿈인 걸까?’
눈을 감았다가 뜨면 전부 사라질 환상이 아닐까, 하고 그녀는 홀로 멍하니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가진 상식으로서는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런 어딘지 알 수 없는 곳 한복판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믿어지질 않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지금 그녀의 몸에 고스란히 스며드는 추위는 더할 나위 없이 현실적인 감각 그대로라, 여자는 정말 자신이 처한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혼란에 젖은 여자의 눈동자가 망연히 설원을 비췄다. 사람은커녕, 짐승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하얀 적막 위에서 그녀가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푹하고 빠져드는 발목 아래로 눈 밟는 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렸다.
‘대체 나는 왜 이런 곳에 있는 걸까.’
이러다가 얼어 죽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덜컥 솟았다.
그래, 꿈이건 다른 무엇이건 이대로 얼어 죽기보단 우선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왜 자신이 이런 상황에 놓였느냐는 확인보다도 살기 위한 본능이 먼저 앞섰다. 그녀는 제 몸을 녹일만한 따스한 공간을 찾아 다급히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이 근방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그녀의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새하얀 눈과 퍼붓는 바람결을 따라 쌓여가는 눈더미뿐이었다.
“누가 좀 도와주세요!”
간절함이 담긴 외침이 크게 번졌다. 푹, 하고 다시 발목이 눈 안으로 빠지고 그녀가 그 반동으로 휘청였다. 간신히 몸을 바로 세워 넘어지지 않을 수는 있었지만, 추위에 꽁꽁 얼어붙은 나머지 이젠 붉게 그을린 것 같은 뺨이 홧홧했다. 익숙하지 않은 운동을 한 탓일까, 숨이 금세 턱까지 차올랐다. 날카로운 바람이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조용히 훔쳐냈다. 당장이라도 크게 소리 내 울 것만 같은 것을 간신히 추스르며, 재차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불안함이 담긴 시선과 함께 그녀가 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여전히 주변에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보이지를 않았다. 길을 잃고 헤매는 아이처럼 그렇게 설원을 한참 맴돌고 있으면, 어느새 조금씩 날이 저물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해가 완전히 지면 정말로 목숨이 위험할 터였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 죽고 말 거야.’
제 옷소매를 붙든 손에 꽉 힘이 들어갔다. 최대한 바람이 들지 않도록 옷을 굳게 여미고는 그녀가 천천히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갔다. 새까만 어둠과 발끝에 채는 눈을 헤집는 발길이 점차 거칠어졌고, 하얗게 솟은 눈의 언덕 위로 조금씩 차오르듯 넘실거리며 까만 어둠이 떨어져 내렸다. 밤이 되자마자 조금씩 소리 없이 다가서는 죽음의 그림자가 느껴졌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한 공포가 몰려들고 그녀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누구…… 아무도 없어요?”
두려움에 젖은 목소리가 애원하듯 터져 나왔다. 대답 없이 허공을 떠도는 외침이 대체 몇 번째인지도 몰랐다. 이젠 감각도 잘 느껴지지 않는 양 팔꿈치를 꼭 붙들고선 그녀가 초조하게 고개를 드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선객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헉, 하고 그녀가 반사적으로 숨을 삼켰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새하얀 언덕 위에는 그녀 자신 밖에는 서 있지 않았는데. 움츠러드는 어깨를 붙드는 손길과 더불어 누군가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가만히 간질였다. 어딘가의 외국어인 것일까,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무척이나 낯선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저, 저어…….”
놀라움과 더불어 깊은 안도가 그녀의 눈 안에서 일렁였다. 지금 바로 등 뒤에 서 있는 누군가가──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에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 몰랐다. 그녀가 더듬거리며 다시 입을 열면, 그것을 깨달은 남자가 어깨를 붙든 손을 천천히 놔주었다. 떨어져 가는 손길을 저도 모르게 아쉬운 듯 힐끗 바라보면, 그녀는 제 어깨를 붙잡았던 손이 새하얀 장갑에 감싸져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너울거리는 남자의 손짓을 따라 바람을 타고서 그로부터 은은한 담배 향이 흘렀다. 아니, 분명 담배도 있지만 무언가 조금 다른 것이 뒤섞인 것만 같았다. 어디선가 맡아본 적이 있었던가. 무언가를 태운 것만 같은 묵직하고 씁쓸한 향.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잡아낼 수 없지만, 코끝을 스치는 향기에 그녀가 의아한 듯이 입술을 달싹였다가 이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제가 지금 길을 잃은 것 같아서…….”
남자의 머리를 덮고 있는 붉은 모자가 그녀의 머리 위에 검은 그늘을 만들었다. 더듬거리며 최대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려는 그녀의 모양새에 눈앞에 마주 선 남자가 찬찬히 옆으로 고개를 기울이는 것이 보인다. 머뭇거리는 몸짓으로 그녀가 눈을 깜빡이면, 그제야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상대방의 얼굴에 겨우 시선이 닿았다.
그녀가 딛고 서 있는 눈만큼이나 창백한 피부, 선명한 윤곽을 띄고 있는 턱선과 이목구비. 그리고 이쪽을 뚜렷하게 사로잡고 있는 붉은 눈동자가 그녀의 검은 시선과 서로 깊이 얽히고 있었다.
장갑을 낀 남자의 손이 우아한 움직임으로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 그와 동시에 쿵, 하고 그녀는 제 심장이 크게 뛰어오르는 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그래, 인간이로군.」
뜻을 알 수 없는 남자의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그녀가 넋을 잃은 것처럼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크림을 핥은 고양이처럼 즐거움이 가득 서린 눈매가 가늘게 접히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하얀 설원의 위로 시커먼 밤하늘이 아른거렸고, 그녀의 머리 위로는 하나뿐인 북극성이 반짝였다. 아득히 머나먼 자리에서도 줄곧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을 별이란, 이 얼마나 찬란하고 아름다운지. 남자의 입술을 타고서 그녀의 목덜미 위로, 잔잔히 웃음 섞인 숨결이 내려앉는다.
「길을 잃었나?」
아, 이번에야말로 정말 꿈인 게 아닐까. 눈 앞에 펼쳐진 정경이 정말이지 거짓말 같았다. 어쩌면 살을 에는 추위를 견디지 못해 결국엔 자신이 드디어 쓰러진 것은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제 목덜미를 느리게 쓸어내리는 손끝을 따라, 그녀는 자신도 남자를 향해 느리게 손을 뻗었다.
꿈이라면, 그래. 한 번쯤은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 작은 충동에 따른 행위였다.
남자의 서늘한 뺨 위로 그녀의 손가락이 천천히 그 새하얀 피부 위를 기었다. 충분히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 뺨에 닿아오는 손길을 거부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꿈처럼 제 입술 위로 맞닿는 부드러운 감촉.
어렴풋이 남아있는 온기가 그녀의 입술에 조심스레 포개어지고, 스스로가 한 행동에 뒤늦게 놀란 것처럼 그녀가 화들짝 제 얼굴을 떼어냈다. 다급히 뒤로 물러서려는 그녀의 허리를 남자의 긴 팔이 놓치지 않으리란 것처럼 단단히 휘감아왔다. 그의 등 뒤로 은은히 달빛이 쏟아지고, 이윽고 즐거운 듯이 미소 짓는 남자의 눈동자를 따라서 그녀의 눈동자가 당혹을 내비치는 것이 그대로 반사되고 있었다. 동그랗게 뜬 눈이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면, 마치 검은 베일 위에 눈 부신 빛의 조각을 수놓은 것처럼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한없이 아름다운 밤하늘이 펼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내가 지금 이 사람과 키──.
“재미있군, 아가씨.”
그건 그녀가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였다. 그녀가 놀란 마음에 크게 입을 벌리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재차 속삭였다. 허리를 붙든 남자의 손길에 더욱 힘이 들어간 것도 같았다.
“이름은?”
“저는, 그게……어?”
어색한 얼굴로 그녀가 대답하려는 찰나, 멍하니 벌렸던 입술이 그대로 다물렸다가 다시 벌리기를 반복했다. 마치 물속에서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입을 한참이나 벙긋거리고 있던 여자의 안색이 그 뒤를 이어 파리해졌다. 자신의 이름도, 그 무엇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어째서 이런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던 거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다른 일들을 모두 제쳐두고 안전한 장소를 찾아 헤매던 것이 문제였던 것일까. 자신이 여기 있는 이유는? 나는? 혼란에 빠진 그녀가 제 이마를 감싸 쥐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보고서 무엇을 생각한 것인지, 남자는 그때까지도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이 입을 열었다.
“────.”
“……예?”
“────로 하도록 하지.”
“무슨……말씀이세요?”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운 것이 분명해 보이는 여자의 얼굴이 자신을 향한 남자의 말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서로를 지긋이 마주하는 시선에 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은 남자가 천천히 제 입꼬리를 끌어올리더니 이내 그녀의 허리를 휘감고 있던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저, 저기요! 자, 잠깐만요!”
허공으로 가볍게 들어 올려진 여자의 입에서 작은 비명이 새었지만, 남자는 그녀의 태도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것처럼 태연히 걸음을 옮겼다. 무거운 발걸음과 함께 푹, 하고 눈이 아래로 꺼지더니 이윽고 다시 앞을 향하여 나아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나아가는 새하얀 길을 향하여, 언제까지고 짙은 밤하늘이 이어졌다.
- 너만의 북극성을 따라라 (오한숙희, 가야미디어, 201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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