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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ISSION

[1차] Obsession Outline

by 제이@J 2021. 11. 16.
*[Commission] 조각글 커미션 공지사항

*커미션 샘플 글, 오늘의 커피 타입(7,676자)

*1차, MPC 이현우&여 진

*자캐커뮤니티 《인게이지 아웃사이드》의 세계관 포함, 논커플링


*BGM 박미선(드라마 미스티 OST)-THERE WERE NONE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깜빡이는 눈매 아래로 길게 그늘이 졌다. 불빛 한 점 없이 어두운 방 안에 홀로 벽에 기대어 앉아 있던 청년은 창밖 너머에서 서서히 들이차는 햇살을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천천히 제 몸을 일으켰다. 까맣게 내려앉은 그의 눈가 위로는 짙은 피곤이 깔려있었다. 남자는 느릿한 움직임으로 팔을 들어 올리더니 지친 것처럼 그것을 제 얼굴 위로 한번 얹었다가, 이내 이마에 닿는 머리카락과 함께 손을 아래로 미끌어트렸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행한─몇 번째인지 모를 게이트 순회로 인하여 드디어 현우의 체력에도 한계라는 것이 가까워지고 있었던 차였다.

“…….”

소리 없이 숨을 내쉰 이현우가 이윽고 겹쳐져 있는 커튼으로 손을 뻗었다. 커튼레일이 차르륵 거리며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제 눈앞을 한껏 가리고 있던 두터운 천이 조금씩 옆으로 젖혀졌다. 조금 전 그의 단잠을 깨우던 빛줄기가 곧 사방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놓여진 가구라고는 침대와 협탁, 그 옆에 놓여있는 의자가 전부인, 생활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텅 빈 방이 보였다. 한순간에 밝아진 방 안을 잠시 찬찬히 둘러보던 청년의 검은 눈동자가 얼마 가지 않아 벽에 걸려있는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째깍거리며 움직이는 초침 소리와 함께 시간은 어느새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가 생각한 것보다는 조금 더 이른 아침이었다.

“……지겹게도.”

누군가를 향한 것도 아닌 나직한 속삭임이 조용한 공간 안에서 울려 퍼졌다. 이현우는 피로에 젖어 무겁게 늘어진 제 눈꺼풀을 다시 아래로 내리깔았다. 까맣게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시야를 마주해서야 겨우 숨통이 트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변은 예고 없이 일어났다.

대한민국 서울에서 발생한 최초의 『블랙게이트』를 시작으로 하여, 세계 각국에서 연달아 발생하기 시작한 게이트는 수많은 이들의 죽음과 비극을 낳았다. 하지만 처참한 이변과 더불어 나타난 『시스템』의 존재와 이능력을 가진 ‘각성자’의 등장을 통하여 사람들은 그 끔찍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보기 시작하였다.

마치 게임 속의 시스템을 연상시키는 존재의 등장에 많은 각성자들은 이능력을 가진 자기 자신들을 일컬어 하나둘씩 『플레이어』라 부르기 시작하였으며, 국제 정부에선 이러한 현상을 인정함과 동시에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이변─게이트에 대응하기 위한 전문 플레이어 기관을 세울 것을 발표했다.

그리하여 2년 전, 블랙게이트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던 대한민국에 본사를 두고서 설립된 국제 정부의 공식기관이자 전문 플레이어 기관이 바로─‘국제플레이어기관’[각주:1]이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등장하기 시작한 플레이어는 처음에는 모두에게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끝도 없이 벌어지는 참사와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이능력 각성자의 존재는 사회를 크게 뒤 흔들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 국제 전문 기관인 IPO의 존재까지 결합되어, 지금에 와서는 플레이어의 존재란 우리 사회에 있어서 절대 없어선 안 될 존재로서 굳건히 자리하게 되었다.

IPO에서는 이러한 플레이어들의 보호와 통제를 위함이라는 명목하에 이능력을 각성한 사람들은 해당 기관에 필수적으로 개인정보를 등록하도록 하는 법안을 실시하도록 만들었으며,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 기관을 통하여 생계를 이어가게 되었다.

사람들은 마수를 잡아 죽이는 것을 업이자 의무로 삼게 된 플레이어들을 향하여 자연스럽게 사냥꾼과 같다는 의미에서─『헌터』라 명명하기에 이르렀고, 이는 눈 깜짝할 새에 대중들에게 널리 퍼져 각인되기 시작하였다.

참사로 인하여 망가진 도시는 빠르게 복구되었다. 대한민국 서울의 경우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2년 전에 발생한 블랙게이트로 인하여 크게 파괴되었던 도시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부분의 지역이 본래의 모습 혹은 그 이상의 도시로서 제 위상을 되찾아갔다. 서울과 수도권 내를 중심으로 한 번화가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플레이어들을 위한 성지이자 가장 큰 중심 상가가 되었고,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일종의 핫플레이스로 자리했다. 이 모든 것이 2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졌다고는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잔잔하게 흘러가는 구름과 싸늘하게 꽂혀오는 찬바람이 지금의 날씨가 한겨울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얼어붙은 손끝에 잡힌 검이 서늘하니 차가웠다. 제 손아귀에 단단히 붙잡힌 무기를 움켜쥐고선 이현우가 이른 아침부터 바삐 어디론가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땅을 박차고 달려나갈 듯한 빠른 걸음에 드문드문 스쳐 지나는 사람들이 의아한 눈을 하는 것이 보였지만, 정작 본인은 눈길도 주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현우가 발길을 옮긴 번화가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골목길은 인적이 무척이나 드물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주변 일대가 모조리 주택가로 되어 있어 사람이 당장 이 자리에 없다고는 해서 절대로 방심은 할 수는 없는 그런 지역이었다.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이 오른쪽으로 꺾이고, 그대로 들어온 길의 끝으로 주저 없이 다가섰다. 이현우가 자리에 바로 서면,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가 찾던 것이 진정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날 것이 분명한─‘정해진 게이트’의 순회였다.

그가 지금껏 가능한 한 손에 넣어온 모든 ‘정보’들을 통해서는 물론, 이현우 자신이 직접 ‘경험’함으로써 2차, 3차 확인까지 이미 끝마친 뒤였으니 그것은 확실을 뛰어넘어 확정된 일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방해만 끼어들지 않는다면야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애초에 이런 낯선 장소에서 갑작스럽게 무언가가 끼어들 확률 또한 희박했으니 상황은 그가 생각한 그대로 전개될 것이었다. 또 이현우는 언제나 홀로 움직였고 누가 그의 행방을 물어보아도 늘 입을 꾹 다물고서 침묵을 지키는 것을 택했으니, 누군가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쌀쌀한 겨울 하늘 아래에서 그가 차분히 숨을 토해냈다. 마치 준비운동을 하는 것처럼 심호흡을 반복하면, 현우의 긴 숨결을 따라 길게 꼬리를 이은 하얀 김이 허공에 서렸다가, 이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산산이 녹아서 사라지는 것을 되풀이했다.

앞으로 30분 정도일 터였다.

주머니 안쪽에 있었던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선 이현우는 다시 세심하게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다음의 상황을 알고 있음에도 조금씩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함이 더해갔다. 달라질 것 하나 없는 평온한 주택가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변함없는 도시의 공기 사이로 일그러지듯이 등장할 비일상의 형체가 자꾸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듯해서 머릿속에 더욱 깊은 괴리감이 스몄다.

찬찬히 고개를 옆으로 내저으며 제 상념을 흐트러트린 이현우는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금방 그가 기다리던 게이트가 나타날 것이었다.

“아가.”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이현우의 뺨이 딱딱하게 굳었다. 곧 서른에 접어드는 나이인, 다 큰 사내에게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호칭이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 목소리를 지금 이 자리에서 들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탓도 있었다. 갑작스러운 그 부름에 진심으로 놀란 것으로 보이는 두 눈이 까맣게 요동치고 있는 것이 선명히 드러났다.

“어머, 이런 곳에서 보네요.”

이현우가 조심스레 등을 돌려 상대를 확인하면 너무나도 낯익은 여성이 한 명, 그의 바로 뒤에 멈춰 서있는 것이 보였다.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남자의 표정에 그녀는 조금 가만히 웃더니, 이내 그 자리에 서서 느긋이 팔짱을 꼈다. 골목의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던 청년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기색이 내비쳤다.

“……여 진씨.”

최대한 담담하게 억누르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이 여실히 느껴지는 목소리로 이현우가 그녀를 불렀다. 뭐가 그리 불안한 것인지, 마치 주인의 눈치를 살피는 강아지처럼 자신을 꼼꼼히 살펴오며 힐끔대는 시선에 진의 입가에 자연스럽게 웃음이 새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예요? 여기는 번화가랑 거리도 먼 곳인데…… 게다가 이런 이른 시간에.”

“잠시…… 급한 일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일이라면, 헌터 일인가요?”

“예, 이 주변은 위험하니……이만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위험하다면 저만 갈 수는 없잖아요, 아가도 저와 함께 가야죠.”

부드럽고 짐짓 다정한 어투가 풀솜으로 이현우의 목을 졸라매듯 함께 이곳을 벗어나기를 채근했다. 절대로 억지로 강요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그에게는 단호하기 그지없는 말로 들렸다. 대답 없이 상대를 보고 있자니, 당사자는 자신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은 것이 명백했다. 남이 무어라 생각하든지 더없이 해사하게 웃고 있을 뿐인 그 뻔뻔한 얼굴을 가만 마주 보던 이현우가 잠시 말을 잃고선 헤맸다.

“……이래 보여도 저는 S급 헌터입니다. 걱정하실 문제는 아무것도 없으니, 부디 신경 쓰지 마시고 빨리 돌아가시죠.”

이현우로서는 무척이나 드물게도 제 권위를 이용한 직접적인 발언이었다. S급 라이센스를 가진 헌터. 그것도 기관이나 길드의 서포트를 받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에 속해있지 않은 프리 헌터라는 것은 사실상 거의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사람 정도밖에는 없었다. 심지어 그들은 그만큼 제 실력에 자신이 있거나, 홀로 죽고 싶어 하는 미친놈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았으니. 게다가 자기가 가진 능력의 한계나 단점이 명확한 이현우의 능력─‘절단’으로는 S급의 자리에 오른다는 현상 자체가 거의 기적과도 같이 여겨졌다. 이현우의 경우에는 자신이 가진 또 다른 ‘능력’이 있기에 비로소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물론 그것을 모르는 이들이 생각하기에는 오로지 그의 노력이나 순수한 업적으로 보일 터였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눈앞에 있는 이현우 자신이 몇 번이고 몇백 번이고 죽고, 다시 새로이 ‘회귀’를 반복해왔다는 점을 두고 생각한다면 그 또한 어쩌면 노력이라고 말은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것을 떠올린 진이 속으로 쓰게 웃었다.

“S급 헌터라고 해서 사람이 아닌 건 아니잖아요. 다치는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괜찮으니 이만 가십시오.”

“안 가요, 아가가 저랑 오늘 점심이라도 같이 하면 또 모를까.”

어딘지 모르게 장난기가 서린 듯한 진의 말투에 마주 보고 있었던 현우가 입술을 꾹 닫았다. 머리가 지끈거리기라도 하는 것인지 결국 제 이마에 손을 올린 그가 새까맣게 죽어있는 눈으로 차분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가십시오.”

“함께 점심 먹으러 간다고 하면 그렇게 할게요.”

“저는 지금 당신과 장난을 할 기분이 아닙니다.”

“네, 저도 진심인걸요.”

“여기는 정말 위험합니다.”

“그럼 같이 있을테니, 아가가 절 지켜주면 되겠네요.”

“여 진씨.”

무표정하던 이현우의 표정에 살짝 균열이 일었다. 누가 보아도 걱정하고 있음이 그대로 비쳐보이는 눈을 하고서 저리도 자신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태도를 가장하는 것을 보면 늘 안쓰러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가 저러는 이유를 잘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진은 눈앞에 보이는 남자의 이런 모습이 분명 이현우 자신에게 있어서 절대로 어울리지도, 맞지도 않는 일 중 하나일 것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괜찮아요, 지금은 난도 같이 있고.”

그녀가 발밑의 그림자를 가볍게 부츠의 앞코로 두드리면, 그 아래에서 까맣고 작은 형태의 마수가 불쑥 치솟았다. 마치 바닥을 뚫고 튀어나온 것 같은 그것은 그녀가 키우는 반려 마수이자, 그림자 마수인 ‘난’이었다.

커다란 고양잇과의 동물을 연상시키는 자그마한 검은 짐승이 그르릉 하고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진의 발치에서 제 몸을 문질러 대는 것이 보였다. 마수를 싫어하는 이현우의 미간이 눈앞의 짐승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구겨졌지만, 금세 다시 평상시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새빨간 목걸이를 채우고 있는 모양새와 커다란 그림자 마수의 본래 크기보다는 두 배정도 작은 것을 보아하니, 반려 마수와의 산책을 하기 위해 그에 준하는 장비를 착용해둔 것 같았다.

게이트에 진입하여 저 목걸이를 풀어낸다면 확실히 어느 정도 그녀를 지킬 보디가드로서의 역할을 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불과할 것이었다. 이 자리에 등장할 게이트의 최종적인 등급은 C로 큰 위협이 될만한 게이트는 아니었지만─무리 생활을 하는 마수들이 잔뜩 몰려있는 탓에 이현우 혼자서라면 모를까, 다른 사람과 함께 들어가기에는 그리 만만치가 않은 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가 이 자리에 그녀와 같이 있다고는 해도, 아무런 경험이나 준비도 없이 진을 게이트로 함께 데려가는 일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리고 이현우가 아는 한, 눈앞에 있는 여 진은 자신을 지킬 능력이나 수단을 특별히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단순히 그가 모를 뿐일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섣불리 게이트 안으로 데리고 갈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제가 일을 하고 오는 동안에 잠시 이 자리에서 벗어나 주시죠. 그 후에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식사든 뭐든 함께 해도 좋으니까.”

“정말이죠, 아가?”

“예, 정말입니다.”

“약속이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러니 이만 가시죠.”

“그럼 끝나고 바로 연락해요, 제 번호 알죠?”

“……끈질기십니다.”

“저번에는 일이 있다면서 도망쳤잖아요.”

“아니, 그때는─.”

정말로 바빴습니다. 정확한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고 뒷말을 어물거리던 이현우가 끝내 이어질 말을 입 밖으로 내어놓지 못하고선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고 무엇이 그리 즐거운 것인지 진이 소리 내 크게 웃어 보였다. 맑은 구슬이 굴러가는 것 같은 고운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이쪽을 살짝 올려다보며 화사한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웃어 보이는 진의 모습이 비쳤다.

“아가,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잠깐 들어줄래요?”

“무슨 말인데 그러십니까.”

얌전히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진은 여전히 제 발치를 빙글거리며 맴돌고 있는 난의 털을 찬찬히 한번 쓰다듬더니 잠시 짧게 텀을 두었다. 고요히 마주친 시선이 서로 얽히고, 차분히 침전한 분위기 사이로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의 붉은 입술이 긴 기다림 끝에 조심스럽게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고 나서야 이현우는 제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한 사람이 죽고 또 죽어, 그리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 반복을 이어가는 세계. 만약 이 끝없는 회귀궤도를 그리는 세상 속에 주인공이 있다고 한다면──그녀는 이 이야기의 해답을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깨닫게 되는, 그녀가 처음으로 눈을 뜬 ‘자각’의 시작이 이 남자였기 때문에.

자신이 하염없이 이 남자의 죽음을 바라고 마는 것은 분명 그녀가 지금까지 미처 죽이지 못한 해묵은 아집(我執)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스스럼없이 제 입 밖으로 내뱉기에는 너무나도 간절하고, 또 끔찍하리만치 처참한 요구였기 때문이었다.

그녀 자신은 일평생 무욕을 쌓아왔고 또 그만큼 오래도록 이해해왔다. 그건 뼈와 살이 되도록 사무치는 어머니의 마지막 가르침이자, 그리고 그간 그녀 자신이 오래도록 끌어온 절대적인 강박이기도 했으니까. 말하자면 그녀가 그에게 하고 싶은 이 한마디의 말은─진에게 있어 절망적인 수치이기도 한 것이었다.

“아뇨, 별 것 아니예요. 잘 다녀와요, 아가.”

“예, 그럼…… 나중에 뵙도록 하죠.”

조금 석연치 않은 것처럼 그녀를 보던 시선이 이내 질척이는 늪처럼 시커멓게 가라앉아 다시 등을 돌렸다.

──나는 사실 당신이 이번에도 죽어줬으면 좋겠어요.

비웃음을 머금은 누군가의 부드러운 속삭임이 그녀의 마음속 깊이 닿았다가 이내 사그라졌다. 바람에 흔들리는 긴 금발과 붉게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등진 여자의 눈동자가 잔잔히 일렁였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그 말을 꾹 눌러 삼키고서, 이현우에게서 천천히 등을 돌렸다. 서로의 등을 등지고 선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로 길게 엉겼다가, 점차 거리를 두며 멀어져갔다.

 

  1. 국제플레이어기관(International Players Organization), 통칭 IPO.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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